[인터뷰_침묵하지 않는 춤 ③] 인정주 안무가 “안무가-엄마-노동자의 트라이앵글, 내가 나를 더 사랑하는 수밖에”
2021 인터뷰 시리즈
[침묵하지 않는 춤 –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페미니즘적 관점과 사유가 확장되고 있다. 퀴어/여성 서사에 주목하는 문학, 페미니즘 연극제, 여성주의로 읽는 미술사 등 위계와 차별에 맞선 창작과 기록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는 끝없이 이어진 문화예술계 미투, 성폭력과 가부장적 폐습을 지적하고 성찰을 요구해온 목소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몸이 주요한 매체이자, 곧 주체이기도 한 춤의 세계는 어떨까? 2021년 한 해 동안 이 질문을 오래 품고 동시대의 춤을 탐구해보려 한다.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라는 부제를 단 이번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성별, 장애, 나이, 외모, 성 정체성,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등과 관계없이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않는 실천 윤리인 페미니즘을 중심에 두고 지금, 오늘의 춤을 살펴본다. ‘침묵하지 않는 춤’은 무용 담론에서 벌어져 왔던 위계와 배제의 구조를 확인하고, 수행적인 예술로서 춤추기를 멈추지 않은 이들에 관한 기록이다.
왜 예술계에서 엄마됨은 잘 보이지 않는 걸까? 또는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엄마됨의 과정에 대해 들어볼 수 없는 걸까? ‘여성’을 둘러싼 이슈들이 다층적으로 다뤄지는 현대예술 안에서 왜 유독 ‘여성-엄마’라는 주제는 드러나지 않을까1
<자아 예술가 엄마>라는 책의 첫 장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시각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엄마이자 예술가인 여성의 다양한 목소리를 꼼꼼하고 곧게 엮은 기록물이다. ‘현대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춤’을 끌어올려 본다. 그렇다면 ‘여성-엄마-춤’으로 연결된 세계는 어떨까?
춤추던 여성이 엄마라는 정체성을 택하는 순간 펼쳐지는 새로운 자장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그들이 발견하고 길어 올린 이야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과연 우리 앞에 온전히 도달한 적이 있기는 할까? 오!마이라이프 무브먼트 씨어터(Oh! My Life Movement Theater, 이하 오!마이라이프)를 창단한 인정주 안무가의 창작과 활동 연대기 역시 오!마이라이프의 작품 소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편이었다. 오!마이라이프는 인정주 안무가가 남편이자 동료인 밝넝쿨 안무가와 공동으로 창단한 무용단이다. 그가 여성으로, 양육자로, 안무가로 통과해 온 시간. 그사이 빚어낸 영감과 고단함, 빛나는 발견을 힘주어 기록하고 싶은 욕구를 담아 만남을 청했다.
오!마이라이프를 만들고 나서 첫 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 프로듀서 역할도 혼자 다 했다. 몇 년간은 무용 축제 팀에서도 일했는데, 작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모두 그만뒀다. 그간 내 작업은 극장 중심이었다. 무대를 꾸리고 무용수 개런티를 확보하려면 최소한의 지원금이 필요하다. 그런데 3년 연속 줄줄이 떨어졌다. 아이를 낳고 2년의 공백이 더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작업적으로도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출산 직후 복귀는 경제적으로 넉넉하거나 대신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5년 동안 모든 지원에서 배제되다 보니 어쩌면 세상의 전부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그동안 속한 무용계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무용계 내에 학연과 지연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었고, 그나마 있는 열악한 지원 체계는 청년 예술가 중심이 다수였다. 인정주 안무가와 같은 40대 동료 무용가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한, 무용을 그만두거나 각개 전투로 살아남는 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을 해왔기 때문에 그동안 나는 무용에 모든 걸 걸어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게 이런 거라니. 무용계에는 상당 부분 남성 위주의 측면이 있다. 요즘은 청년으로 지원 수혜가 넓어지면서 나아졌겠지만 심했던 시절도 있다. 안무가들이 남성 무용수를 선호한다거나 하는. 한 번은 밝넝쿨씨와 공동 안무를 올린 적이 있는데 내 이름은 아예 언급이 안 된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오래도록 선망해왔던 이곳을 벗어나 새롭게 홀로 서지 않는 한 작업이 어렵겠구나. 지원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혼자 설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오!마이라이프가 추구해오던 가치와 정신으로 돌아가게 됐다. 2005년 창단한 오!마이라이프의 모토는 ‘순수한 몸과 자유로운 실험 정신’이다.
움직인다, 그러면 이 움직임은 어떤 선생님께 배운 동작 같고 저건 무슨 테크닉 같다. 내 춤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몸에 학습한 테크닉과 습(習)이 남아 있어서 내 춤을 추려고 할 때마다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지닌 다양한 스타일, 테크닉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현해 내 춤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감각을 회복하고 순수한 몸에 가까워져야 한다. 내가 경험하고 배우고 학습한 것을 딛고 서면 내 춤을 출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이처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던 아이는 성장하면서 직립 보행에 익숙해지고 뇌가 발달한다. 자연스럽게 본능적 감각은 희미해진다. 순수한 몸에 대한 탐구와 열정은 인정주 안무가를 ‘아이’라는 존재와 가까워지도록 이끌었다. 삶에서도, 춤에서도.
2011년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고민에 빠졌다. 나는 예술가인데 경제적으로 아이에게 번지르르하게 줄 수 있는 게 없다. 예술을 하는 부모는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춤 말고 가진 게 없는 나는 무용 작업을 정말 열심히 해서 작품으로 보여줘야겠구나. 그러면서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커졌다. 하지만 단지 욕구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용이라는 바탕 위에 새로운 공부가 필요했다.
인정주 안무가의 ‘엄마됨’은 무용 작품의 관객을 어린이로 넓히는 동력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어린이 무용 작품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예술 대학의 아동 청소년 학과에 문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먼저 어린이 작품을 시작한 작업자에게 자문을 청하고, 육아 책과 어린이 책을 섭렵하며, 예술교육가(TA, Teaching Artist)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작품을 올리기에 앞서 예술 교사 활동을 먼저 시작했다. 양육과 춤과 경제 활동을 일상 안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마주한 예술 교육가라는 직업은 의외로 잘 맞았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용 작업을 하면 안무비가 없는 경우가 잦았다. 운 좋게 지원금을 받아도 무용수 개런티, 대관료, 조명 감독료 등으로 쓰이면 남는 건 없고. 반면 예술가 교사 일은 방학 기간을 제외하면 3개월씩 급여가 들어왔다. 처음 받은 월급으로 아이와 여행을 갔다. 아이가 너무 좋아하더라. 그러다가 갑작스레 아프게 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당시 좀 심각해서 질병관리본부 차량이 교육가던 학교에도 오고 그랬는데. 너무 죄인 같은 심정이 들었다. 물론 몇 년 후에 다시 돌아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긴 했는데 내가 못 가겠더라. 그 시기에는 일도, 작품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경제 활동과 양육을 헤쳐가야 하는 창작자 부부 앞에 놓인 현실은 개인의 노력과 성실함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돌보는 누구나 생계, 양육, 자아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겠지만 양육을 하는 여성 창작자에 대한 작업 환경은 사회 구조 안에서도, 문화 예술계 내에서도 우선순위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시간도 일도 돈도 작업도 뺄셈을 향해가는 와중에, 여성 무용수를 대하는 편견과 공고한 사회 구조만은 덧셈 쪽으로 기울었다. 그 사이 공백은 더 길어졌다.
공백기 동안 아이와 함께 간 공연에서 한 (무용) 선생님을 마주친 적이 있다. 아이와 함께 인사하려고 하니 그분이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애한테 미쳐서 작업은 안 하고. 작업을, 해야지.” 인사도 받지 않고 고개를 싹 돌리면서. 당시에는 기분이 몹시 나빴는데 오래도록 생각해보니 마냥 틀린 말은 아니더라. 그렇지, 지금 나는 이 아이가 중요하지, 그러니까 어린이 무용 작업을 더 잘해야겠다.
인정주 안무가가 아프면서 느꼈던 죄책감은 아이들에게 멋진 작품을 선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승화됐다. 나의 아이와 함께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 작업을 펼치면 그것 참 멋진 일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생계도 중요했다. 출산 후 바뀐 호르몬은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키우면서 생존 본능을 키웠다.
남편과 나 둘 다 무용을 해왔고 급여 생활자가 아니니까 일이 없으면 수입이 계속 없다.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그랬지만,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다음 학기에 내 이름이 없으면 짐을 싸야 한다. 그러다 코로나 19가 터지면서 더 힘들어졌다. 우연히 지인을 통해 보험 설계사 일을 제안받았다. 뭘 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하던 터였다.
보험 설계사는 특수 고용직이다. 개인 사업자이자 영업직이기에 실적 압박이 강하지만, 업무 시간 외에 아이가 필요로 할 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드문 직종이기도 했다.
보험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농담처럼 퍼진 말이 있다. 보험 설계사에게 세상은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뉜다. 보험을 들어주는 사람과 안 들어주는 사람. 오로지 실적이 중요한 세상이니까. 나름 양심적으로 보험 설계를 해주다 보니 기업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찍히기도 했다. 기업 갑질도 당하고. 초반 몇 개월은 아침마다 울면서 출근했다. 그래도 나 예술가인데.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 수모를 이미 겪었으니까.
보험 설계사는 보험 시장에서 가장 밑에 있는 사람이다. 자본이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노동자의 뼈를 갈아 넣은 기업의 이윤 추구 과정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렇게 인정주 안무가는 회사에서는 보험 설계사로, 연습실에서는 작품 안무가로, 집에서는 엄마로, 트라이앵글의 세 바퀴를 바지런히 굴렸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하원 하기 전인 3시까지 모든 게 다 끝나야 한다. 가끔 집에서 일이나 안무 생각에 빠지면 아이가 말을 건다. ‘엄마, 나랑도 즐거운 이야기 해요.’ 그러면 깨닫는다. 아, 지금 스위치가 잘못 켜졌구나. 엄마, 다시 켜. 상황에 맞춰서, 매 순간을 잘 살아 내는 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인정주 안무는 2019년 <과일·악기·그림책>의 연출과 안무로 무대로 돌아왔다. <과일·악기·그림책>의 관객 연령은 6세 이상이다. 아이와 함께 어린이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다가왔던 사운드, 화려한 조명 같은 요소 등을 고심해 만들었다. 몸이 얼마나 경이로운지에 대해, 춤을 누구나 출 수 있다는 걸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
어린이 무용 작품은 단순히 어린이만을 위해 만들기 어렵다. 일단 창작자가 이미 어른이기도 하고. 내가 아이와 공연을 보러 갔을 때 엄마로서 소외된 경험도 있었기에 어린이와 양육자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작업이길 바랐다. 어른과 같이 온 어린이 관객은 어른의 감상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 하다못해 티켓 예매자는 어른이지 않겠나.
어린이를 돌보는 양육자로서의 엄마, 어린이 무용 작품을 창작하는 안무가, 보험 시장의 가장 밑에 있는 설계사. 인정주 안무가의 시선은 낮고 작은 존재를 향해 기울고 있었다.
다 닮았다. 키가 작은 어린이. 그런 어린이와 함께 하는 무용 공연. 낮은 곳에 있는 보험 설계사. 다 그림자 같은 존재다. 노예, 여성, 어린이를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지 않았나. 누군가 너는 낮은 곳으로 가라, 하고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럼 가지 뭐. 낮은 곳에서만 피는 꽃도 있으니까.
<과일·악기·그림책>에 뒤이어 2020년 가을, 육아를 하며 자신처럼 지옥과 천국을 오갔을 여성 무용가를 불러 모았다. 춤추던 여성 무용가들이 결혼 후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이유를 직접 체득했기 때문이다.
예술가 교사를 할 때 아이가 아픈 적이 있었다. 병원 수속을 밟는다길래 양해를 구하고 달려갔는데, 나중에 보니 민원을 넣었더라. 아이가 아프거나, 갑작스러운 돌봄이 필요해질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 우리 사회에서는 약속을 어긴 게 되어버린다. 며칠 전 한 창작자는 레지던시 심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단다. ‘엄마인데 잘 할 수 있겠냐?’ 오!마이라이프 라는 내가 만든 무용단에 내가 돌아오는 데 7년이 걸렸다. 춤 잘 추던 여성 무용가들이 어느 순간부터 잘 안 보이더라. 활동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이유가 각자 있는 것이다.
그렇게 <춤:신 프로젝트 시즌4- 산책>의 댄스 필름을 통해 ‘엄마’와 ‘무용수’ 사이의 삶을 살아내는 일곱 명의 무용수가 모여 거리에서, 온라인으로, 관객을 만났다.
엄마이자 예술가인 여성에 대한 다른 관점과 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단시간에 다 바뀌긴 어려울 테니. 일단은 내가 나를 더 사랑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내가 일을 만들었다. 무용단에게 일 좀 주라, 하면서(웃음). 춤추는 사람들뿐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특히 이 댄스 필름에 많이 공감했다고 하더라.
인정주 안무가의 좋은 작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은 여전히 커지고 있다. 어린이 작업에 관한 고민과 물음 또한 마찬가지의 크기로 부풀고 있다. 아이와 열망과 물음을 품어내는 동안 내면의 아이가 깨어났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등감, 오만함, 타인과 나눌 수 없는 고민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게 무용 작업을 가로막고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었다. 특히 아이를 낳은 이후, 아이의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내며 내 안의 내면 아이가 건드려지더라. 어린 시절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숙제처럼 터지는 것이다. 아이를 돌보면서, 어린이 무용 작업을 하면서 내면 아이의 문제가 하나씩 정리되고 있다. 나만 아이를 돌보는 게 아니라, 아이 역시 나를 성장시킨다. 나는 여전히 더 좋은 작업을 하는 예술가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다만 지금 이 시기를 건너뛰고는 나아갈 수 없을 뿐.
극장이라는 공간, 무용 예술의 환경이 아이를 관객으로 존중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을 수용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인정주 안무가 역시 무대 안팎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전히 시도 중이다.
2021년에는 좀 더 세분화해서 영유아와 청소년 작업을 나눠서 진행해볼 계획이다. 아기 공연이라는 게 단순히 아기 앞에서 공연하는 게 아니라 본질을 다뤄야 하는 작업이다. 순수한 몸으로 회귀하려는 실험의 최전방에는 영유아 공연이 있다. 반면, 청소년 무용은 에너지가 굉장히 필요하고 몸으로 더 가까이 호흡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전까지 어린이 무용이라는 타이틀로 화두를 던졌다면, 조금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
인정주 안무가의 SNS에는 4개의 정체성이 나란이 적혀있다. 육아인, 무용인, 보험인, 수련인. 스스로가 그림자 같은 존재라고 여겨지던 시절, 기공 수련과 몸 체조, 명상, 에너지의 음양 등 을 공부하면서 몸과 마음의 흐름을 꾸준히 단련해왔다고 한다.
어떤 이야기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발견하게 된다. 인정주 안무가가 들려준 삶과 춤은 실은 한 자리에서 대를 이어가며 존재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성실하게 노동하고 작은 존재를 돌보고 창작하는 여성들. 일상의 균형을 찾아 저글링 하듯 숨 가쁘게 움직이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던 여성들. 여성이자, 창작자이자, 양육자이자, 노동자로서 마주하게 되는 광활함과 분주함 속에는 삶과 예술이 혼재되어 있다. 자, 이제 뒤늦게 발견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지는 우리의 몫이다. 현재의 우리는 적어도 과거보다 균형적인 세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1 <자아 예술가 엄마 Selfhood Artisthood Motherhood>, 김다은 기획, 팩토리, 2019
진행|보코, 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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